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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fe ]/Society

무기가 된 '-노'는 잊히고, 고향 말만 심판대에 올랐다

by 쏘가리 2026. 7. 13.

하루 사이 두 개의 '-노'가 있었다.

지난 6월 29일 서울 목동야구장. 배재고 야구부는 광주제일고와의 청룡기 대회 경기에서 상대 투수가 미끄러지자 "왜 그라노", "어젯밤에 뭐했노"라고 외쳤다. 지난 9일 YTN이 보도한 경위서에 따르면, 이 발언은 5·18민주화운동 폄훼 논란을 일으킨 스타벅스 이벤트를 연상시키는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구호와 함께 나왔다. 광주일고 코치진이 항의했고, 심판이 경고했다.

주목할 것은 발화의 구조다. 배재고는 서울의 학교다. 서울 학생들이 광주의 학교를 향해,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경상 방언의 어미를 조롱의 도구로 골라 던졌다. 그 자리에서 '-노'는 사투리가 아니라 무기였고, 수신인은 명확했다.

1980년 5월, 광주제일고 야구부 학생들은 계엄군의 진압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6년 뒤 그 후배들이 운동장에서 들은 것이 '홍어', '폭도'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조롱의 언어였다. 이 사건에는 해석의 균열이 없었다. 지난 6일 YTN 리포트에 따르면 배재고 논란 당시 여론은 5·18 조롱이라는 비판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균열은 하루 전에 벌어진 다른 사건에서 생겼다.

무고한 화자, 그러나 끝나지 않은 질문

6월 28일 걸그룹 리센느 멤버 원이(22)는 유튜브 콘텐츠에서 어두운 방을 보고 "무섭노"라고 말했다. 경남 거제 출신인 원이는 평소 사투리 콘텐츠로 인기를 얻어왔고, 논란 이전 영상에서도 같은 용법을 반복해 써왔다. 7월 1일 경남MBC 김현지 PD가 이를 일간베스트(아래 일베)식 표현이라고 지적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방언 여부의 사실관계는 빠르게 정리됐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지난 8일 YTN 라디오에서 해당 표현이 표준어 '-네'로 치환되는 경상 방언의 감탄문이라고 진단했다. 국립국어원의 2012년 경남 지역어 조사 보고서에는 1934년생 창녕 화자의 같은 용법이 수록돼 있고, 경남신문이 거제 현지에서 인터뷰한 토박이 어르신들도 오래전부터 쓰던 말이라고 답했다. 일베식 표현이 맞다고 주장했던 조수진 노무현재단 이사는 전문가 설명을 들은 뒤 입장을 정정하고 원이 측에 사과했다.

원이는 무고하다. 거제 토박이가 아무도 겨냥하지 않은 채 놀란 감정을 고향 말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 점은 분명히 해두고 가야 한다.

그러나 논란이 '사투리가 맞다'는 판정으로 종결 처리되는 순간, 함께 종결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 어제까지 경상도 밖에서는 낯설던 이 어미가 왜 지금 전국에서 들리는가. 그리고 이 논쟁이 진행되는 내내, 그 어미가 무기로 겨눠온 쪽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었는가.

'-노'의 전국화는 자연발생이 아니다

방언 옹호 측이 제시한 근거들, 1930년대생 화자의 발화, 1980년대 문학, 2000년대 인터넷 게시물은 해당 용법이 일베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존재의 증명과 유행의 설명은 다른 문제다.

수십 년간 경상 지역 구어에 머물던 어미가 최근 수년 사이 지역과 무관하게 인터넷 전반으로 퍼졌다. 경상도 화자가 오프라인 일상에서 접하는 '-노'보다 온라인에서 접하는 '-노'가 더 잦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다. 비영남권 사용자들이 '쉽지않노' 같은 표현을 일상적으로 쓰는 현상은 방언의 세대 전승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확산의 경로에 극우 커뮤니티의 밈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오마이뉴스가 지난 9일 게재한 분석 기사에 따르면, 일베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만들어진 커뮤니티로, 말끝에 '노'를 붙여 고인을 비하하는 화법을 특유의 문화로 굳혀왔다. 원래 있던 방언 어미에 고인의 성씨를 겹쳐 조롱의 기호로 만든 것이다. 이 화법은 커뮤니티 간 모방과 반사를 거치며 원래의 조롱 맥락이 탈색된 채 인터넷 말투의 한 갈래로 퍼져나갔다.

부산 지역 방언 연구자인 이근열 박사의 진단이 이 지점을 짚는다. 이 박사는 지난 7일 국제신문 인터뷰에서 '무섭노'가 방언이 맞다고 확인하면서도, 젊은 세대에서 의문사도 없이 '노'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쓰이는 경향은 자연스러운 언어 변화라기보다 경상도 방언의 희화화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방언의 결백과 유행의 오염, 두 진단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문장을 동시에 붙들 때에만 사태의 전체가 보인다.

여기서 두 문장을 구분해야 한다. "일베식 '-노'를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와 "'-노'를 쓰면 일베다"는 다른 명제다. 전자는 확산의 인과에 대한 진단이고, 후자는 개별 화자에 대한 낙인이다. 김현지 PD의 실패는 전자의 문제의식을 후자의 방식으로, 그것도 가장 성립하지 않는 대상에게 적용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그 실패를 근거로 전자의 진단까지 기각하는 것 역시 같은 크기의 오류다. 이번 논란에서 양측은 서로 다른 명제를 반박하며 평행선을 달렸다.

논쟁에서 지워진 수신인

논란의 지배적 결론은 '아름다운 경상 방언이 혐오 세력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애도로 수렴했다. 이 서사에서 피해자는 방언과 그 화자들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서사만으로 논의가 닫히면, 정작 그 어미가 조롱의 무기로 겨눠온 대상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밀려난다. 그리고 그 다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일베식 '-노'는 허공을 향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롱이자, 그가 상징하는 정치적 계보와 지역, 특히 호남을 향한 혐오의 기호였다. '홍어'와 '폭도'라는 낙인 속에서 자라온 광주의 청년들에게, 배재고 운동장의 "왜 그라노"는 그 계보의 최신판으로 도착했다. 배재고 사태 국면에서 한 광주 청년은 온라인에 이렇게 물었다. 태어나서부터 혐오에 노출되며 살아온 광주 청년들의 아픔은 누가 공감해주느냐고.

수신자의 자리에서 보면 이 논쟁의 화용론은 달라진다. 조롱의 표적이 돼온 이들에게는, 어미의 문법적 결백과 무관하게, 그 소리 자체가 축적된 피해의 기억을 소환하는 신호가 된다. 낯선 이가 '-노'로 말을 걸어올 때 먼저 경계부터 하게 되는 반응은 과민이 아니라 학습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학습을 시킨 것은 조롱을 놀이로 만든 쪽이지, 듣는 쪽이 아니다.

물론 이 관점이 무제한의 거부권이 될 수는 없다. 원이의 발화는 호남을 향하지 않았고 누구도 겨냥하지 않았다. 수신자 관점을 근거로 무고한 방언 화자의 입까지 막는 것은, 김현지 PD의 오폭을 논리만 바꿔 반복하는 일이 된다. 방언 화자가 겪은 위축과 조롱 표적이 겪어온 상처는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반박하는 논거가 될 수 없는, 별개로 응답받아야 할 피해다.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방언 화자의 침묵이 아니라, 밈으로서의 '-노'를 소비하는 이들의 자각이다. 자신이 쓰는 그 말투가 어떤 경로로 자기 손에 들어왔는지, 그 경로에서 누가 다쳤는지를 묻는 일 말이다.

두 논쟁은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이번 논란을 '방언 대 낙인'의 대결로 기억한다면, 그 대결의 전적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논란의 결과 공식적으로 고개를 숙인 쪽은 문제를 제기한 진영이었다. 조수진 이사가 사과했고, 김현지 PD는 계정을 닫았으며 소속 방송사 시청자 게시판에는 해고 요구가 쇄도했다. 반면 방언의 결백은 학계와 지자체, 정치권과 연예계가 나서 보증했다. 개별 사건의 시비로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틀린 관찰은 정정돼야 하고, 무고한 화자는 회복돼야 한다.

배재고 역시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근조화환과 해체 요구가 학교로 몰렸고, 징계가 내려져 학교는 재심을 청구했으며, 여론의 질타는 사회적 매장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거셌다. 두 사건 모두, 각자의 프레임 안에서는 충분히 다뤄진 셈이다.

문제는 그 두 프레임이 끝내 만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배재고 사건은 '5·18 조롱'으로 심판받았고, 그 안에서 "왜 그라노"는 부수적인 증거로만 스쳐갔다. 원이 사건은 '사투리냐 낙인이냐'로 공방했고, 그 안에서 바로 전날 같은 어미가 실제 무기로 쓰였다는 사실은 소환되지 않았다. 같은 어미를 공유한 두 사건이 하루 간격으로 벌어졌는데, 각각의 논쟁은 서로를 참조하지 않은 채 따로 완결됐다. 그렇게 '-노'가 혐오의 도구로 실제 작동해온 이력, 그리고 그 도구가 겨눠온 이들의 자리라는 교차점의 질문만 어느 쪽 결산에도 오르지 못했다.

배재고 학생들은 지난 6일 광주일고를 찾아 사과했고, 광주일고 총동창회는 학생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기지 말자며 선처를 요청했다. 성숙한 수습이었다. 그러나 그 관용의 미담이 소비되는 동안, 왜 광주의 청년들은 또다시 관용하는 자리에 서게 됐는가라는 질문은 두 논쟁 어디에서도 제기되지 않았다. 방언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 동원된 사회적 에너지의 일부라도 이 질문에 쓰였다면, 이번 소동의 결산은 달라졌을 것이다.

출처를 묻는 일

김현지 PD는 논란의 말미에, 그 말에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면 사용에 잠깐의 머뭇거림이라도 둘 수 있지 않느냐고 썼다. 이 문장은 옳다. 다만 수신인을 다시 지정해야 한다.

머뭇거려야 할 사람은 고향 말로 놀란 마음을 표현한 거제 청년이 아니다. 남의 방언을 조롱의 코드로 차용해 던진 이들, 그리고 그 말투를 재미로 소비하면서 출처를 묻지 않는 우리 각자다. 혐오 의도가 없다는 항변은 면책의 근거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 의도 없이 굴러가는 밈이야말로 혐오 표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성공적인 단계이기 때문이다. 배재고 학생 다수가 경위서에서 구호의 의미를 몰랐다고 진술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면죄부가 아니라 경보다.

사투리는 보호돼야 하고, 무고한 화자는 회복돼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논쟁을 닫아서는 안 된다. '-노' 한 글자에는 방언의 층위와 밈의 층위, 그리고 혐오의 층위가 겹쳐 있고, 앞의 두 층위를 정리한 지금 남은 과제는 세 번째다. 이 말이 무기로 겨눠온 이들의 상처를 논의의 자리에 돌려놓는 것. 그것이 빠진 방언 애도는, 비유하자면 오염된 유통 경로를 밝히지 않은 채 원산지만 확인하는 조사와 같다.

말의 결백은 증명됐다. 이제 말의 이력을 물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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