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증명하는 목소리에 대하여
2020년, 세계는 잠시 멈췄다.
공연장의 불이 꺼지고, 함성 대신 정적이 도시를 채웠다. 매년 수많은 음성합성엔진 팬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보컬로이드 콘서트, '매지컬 미라이(マジカルミライ)'도 그 정적 앞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 갑작스런 전염병의 유행으로 사람들이 모일 수 없는 세상에서, 수많은 마음들의 '만남'과 '연결'을 위해 태어난 축제는 존재 이유를 잠시 잃었다.
그해 매지컬 미라이 2020의 테마곡으로 선택된 곡은 피노키오P의 〈愛されなくても君がいる (사랑받지 못해도 네가 있어)〉였다.
愛されなくても君がいる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다는 메시지, 처음 본 제목의 메시지는 체념처럼 들렸다. 그런데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체념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포기의 언어가 아닌, 아주 작은 것으로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고백이 아닐까.
最低の評価でも赤点の答案でも
君が100点つけてくれたら
嘘でも元気出るよ
거짓말이어도 좋다고 한다. 아무리 최악인 평가라도, 낙제점인 답안이라도 네가 100점이라고 해준다면 힘이 난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그 말을 건네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 가사가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건 그 솔직함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종종 진심이 아니어도 위로가 되는 말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인정하는 게 부끄러워 모른 척한다. 이 곡에서는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연약함을 숨기지 않는다.
하츠네 미쿠는 체온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데이터로 이루어진 목소리, 픽셀로 그려진 얼굴. 그런데 이 곡은 바로 그 사실을 정면으로 꺼내들고 있다. 체온이 없어도(体温がなくても), 존재하지 않아도(存在しなくても), 네가 존재를 느껴준다면(君が存在を感じてくれたら). 느껴지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닿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실재한다.
코로나의 해에 이 말은 더 넓은 곳을 향했다.
마스크 뒤에서 표정을 잃은 사람들, 화면 너머로만 서로를 보았던 사람들, 공연장이 아닌 방 안에서 혼자 음악을 즐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우리는 잠깐씩, 자신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는지 의심했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 같고, 들리지 않으면 사라진 것 같은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기계의 목소리로, 미쿠가 말했다.
惑星ですらないデブリの海で
それぞれ都合の良い世界を見ていた
ガラクタだらけの音楽の国で
本当に大切なものを見つけたから
행성조차 아닌 잔해의 바다에서, 각자 자기 좋을 대로의 세상을 보고 있었어. 잡동사니투성이인 음악의 나라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을 찾아냈으니까. 잔해의 바다, 2020년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한 말이 있을까. 무언가 무너진 뒤에 남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는 세계, 그 한가운데서도 소중한 것을 찾았다고, 그래서 노래할 수 있었다고.
ずっとここで初音ミクでいさせてね!
즐거운 파티가 끝나도, 네가 웃는다면 — 계속 여기서 하츠네 미쿠로 있게 해줘. 있게 해달라는 부탁, 존재를 허락해달라는 청원.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이 말은 애처롭기보단 따뜻하게만 다가온다. 그 존재는 혼자서는 완결되지 않고 듣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미쿠가 미쿠로 있을 수 있는 건, 노래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서다.
어쩌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우리로 있을 수 있는 건, 우리를 보아주는 누군가가 있어서다.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는 사실 그 반대를 향해있다. 그래서 네가 있으면 괜찮다고, 보여달라고, 들어달라고, 곁에 있어달라고. 그 바람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존재의 증명이 된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들어주는 네가 있기에 나의 노래가 실재가 된다는 믿음.
2020년, 세계가 한 순간에 멈춘 해에 울려 퍼진 이 목소리는, 이 노래는 그래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흐르고 있다. 잔해의 바다 위에서, 파티가 끝난 자리에서, 거짓말이어도 힘이 난다고 믿고 그걸 삶의 동력으로 삼는 사람들의 귓가에서.
'[ Life ] > 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코로나19 감염 후 증상 정리 (22. 4. 16.) (349) | 2022.09.21 |
|---|---|
| 육군정보통신학교 후반기 교육 (간단)후기 (444) | 2022.06.18 |
개발 적당히, 정치 적당히, 일상 적당히, 그냥 뭐든지 적당히만 하는 소프트웨어전공 대학생, 쏘가리입니다. / Profile Image by REN (Twitter @Ren_S2_)